▲ 이양수 SK이노베이션 SHE본부 본부장

지난 8월 31일, 대구역에서 발생한 KTX 와 무궁화호 열차 충돌사고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한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다. 선행하는 KTX 열차를 보내고 난 후에 출발해야 하는 무궁화호가 미리 출발하는 바람에 뒤따라 오던 KTX 열차와 충돌한 것이다. 만약 무궁화호가 본선에 완전히 진입했더라면 엄청난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 했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동대구역에서 대구역 구간은 일반 열차와 KTX열차가 선로를 같이 사용하고, 대구역은 KTX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역이라 일반 열차는 반드시 KTX 열차가 통과한 뒤에 출발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사고 조사 결과 신호 체계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대기 선로에 있었던 무궁화호의 신호는 정지를 뜻하는 붉은색 신호등이 들어와 있었고 주행선로에 있던 KTX 열차는 진행을 나타내는 초록색 신호가 켜져 있었다. 무궁화호 열차의 경우, 여객전무가 출발해도 좋다는 신호를 확인한 후에 기관사에게 출발 가능을 전달하고 이를 전달 받은 기관사는 다시 한 번 신호를 확인한 후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객 전무와 기관사 모두 정지 신호를 분명히 보았을 텐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사고를 보면서 오래 전 기억이 떠 올랐다. 울산 공장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울산에는 시내를 관통하는 태화강을 따라 강변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어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도로는 강의 남쪽 부분 일부만 있었고, 강변도로가 끝나는 부분에는 급커브로 시내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이후로는 강둑으로 되어 있어 차가 다니지 못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강변도로가 끝나는 부분에는 도로가 없다는 표지판과 함께 진입금지 표지판이 있어 진입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심찮게 이 표지판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하면서 일어난 사고가 방송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다. T.V.에서 강변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방송할 때마다 안전조치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기자의 코멘트가 있었고, 그 때마다 더 잘 보이도록 ‘진입금지’ 라는 안전표지판을 더 크고 선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지만 후일 강변도로가 완전히 개통될 때까지 유사한 사고는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왜 운전자들이 음주운전을 한 것도 아닌데 표지판을 무시하고 그대로 직진하는가?

요즘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 운전자는 드물다. 낯선 곳에서 가서도 쉽게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빠른 길을 찾는 서비스까지 있어 여간 편리한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최첨단 기술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가 있다. 이에 관해 유명한 사고 사례중의 하나가 Luckington이라는 영국의 소도시에서 발생했던 사고다. 2006년 4월, 홍수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이 도시를 관통하는 에이번 강 입구 쪽이 범람하였다. 그래서, 시 당국은 그 길을 폐쇄하고 길 양쪽에는 경고 표지판을 세웠다. 그러나, 그 길이 폐쇄된 2 주 내내 매일 한두 대의 차량이 경고 표시를 지나쳐 강으로 돌진했다. 운전자들이 네비게이션 화면에만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정말 그들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못 봤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라고 명명된 유명한 심리 실험이 있다. 미국 하바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에 의해 실행된 이 실험은 인간의 주의력이 얼마나 많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지 잘 보여준다. 실험의 내용은 이렇다.
농구 경기장에 사람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흰 셔츠를, 다른 팀은 검정 셔츠를 입게 했다. 그리고, 약 1분에 걸쳐 실험 참가자들이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패스를 하게 했고 이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참 패스를 주고 받는 동안 고릴라 의상을 입은 여학생이 선수들 가운데 멈춰 서서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치고 나서 걸어 나갔다. 이렇게 촬영된 영상을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 주기 전 검은 셔츠 팀의 패스 회수는 무시하고 흰 셔츠 팀의 패스 회수만 말없이 세어 달라고 부탁했다. 동영상을 보여 준 후 실험 참가자들에게 패스 횟수를 헤아리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본 사람이 있냐고 물어 보았을 때 놀랍게도 실험 대상자의 절반은 고릴라를 의식하지 못했다. 이 실험은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참가자들의 학력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반 정도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 실험에 참가하고 싶다면 www.theinvisiblegorilla.com을 방문하면 된다) 고릴라가 바로 카메라 앞까지 걸어와 가슴을 친 다음 멀어져 가는데도 왜 50%나 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일까? 고릴라가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

이 실험에서 사람들이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 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대하지 못한 사물에 대한 주의력 부족의 결과이며 과학적으로는 ‘무주의 맹시(Inattention blindness)’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특정 부분의 모습이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물이 나타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있다. 실험 참가자들이 패스 횟수를 세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눈 앞에 있는 고릴라를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세상의 특정 부분에 주의를 집중한다면 이를 더욱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지만, 바로 이런 생생한 경험 때문에 주변의 세세한 정보도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2005년 미국 텍사스주에 위치한 BP 정유공장에서 최악의 폭발 사고가 일어나 15명이 사망하고 170여명이 크게 다치는 중대사고가 발생했다. 정기보수 후 재가동 과정에서 일어 난 이 사고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눈길을 끄는 원인 중의 하나는 눈 앞에 일어난 일을 보지 못한 데 있다는 점이다. 공정을 감시하는 조정실 운전자가 증류탑의 액체 높이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경고가 조정실에 계속 나타났으나 즉각적으로 조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 조사 과정에서 당시 근무자는 전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눈 앞에 있는 계기판에 경보를 알리는 불이 들어 왔는데 왜 보지 못한 것일까?

많은 연구 결과는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 지나치게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 상황이 변화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어느 특정 부위에 집중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 날 경우, 기타 과로나 스트레스 등 육체적, 정신적 문제 등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과거 사람에 의존하던 일이 정밀한 전자 조정 장치나 정교화된 시스템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최종 판단은 사람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의 실수는 더 큰 위험을 가져 올 수 있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사람의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일들은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을 시작하기 전 개개인의 컨디션을 확인하여 필요한 조치를 한다거나, 건설 현장에서 일상화된 위험예지훈련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한다면 조금이라도 실수에 의한 사고를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